시니어 개발자의 카카오엔터프라이즈 500일의 기록
시작하며
2020년 6월에 입사하여 약 500일, 1년 반을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하고 있는 커넥트라이브팀의 Green입니다. 저는 만 20년을 개발자 및 스타트업 대표로 지내왔습니다. 그동안 주로 B2B 솔루션이나 플랫폼을 개발하는 시장에 있다 보니 SI 회사나 외국계 기업 혹은 대형 통신사 등은 섭렵(?)해왔지만 카카오 같은 B2C 회사는 선망의 대상일 뿐 거의 갈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카카오의 자회사 중 B2B 시장을 전문으로 하는 카카오엔터프라이즈 소식을 듣고 큰 관심이 갔습니다. 과연 척박한 B2B 시장에서 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어떤 회사로 성장할까? 마치 카카오뱅크가 금융 시장에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듯 카카오엔터프라이즈도 제가 주로 몸담고 있던 B2B 시장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입사 첫날 라이언 동상 옆에서 사진 찍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벌써 500일이 넘게 잘 다니고 있네요. 제가 어릴(?)땐 한 회사에 3년은 다녀봐야 그 회사 다녀봤다고 어디 가서 말이라도 해봤는데 IT 회사 평균 근속 연수가 매우 짧아진 요즘에는 1년 반 정도면 그래도 사용기 쓸 정도의 짬밥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들어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어떤 회사인지 지인들에게 설명할 때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특히 많은 지인들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헷갈리곤 하는데 비슷한 이름과는 다르게 완전히 다른 시장을 바라보는 회사입니다. 이번 기회에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하는 저의 지인과 세상의 개발자들에게 최대한 주관적인 관점(?)에서 회사에 다니면서 느낀 점을 적어볼까 합니다.
공유와 수평 문화
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수평적인 피드백을 위한 영어 호칭, 신뢰와 보안을 추구하는 100:0 등 참 다양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딱 하나를 고른다면 아지트(agit)이고, 두 번째가 카카오워크라고 생각합니다. 아지트는 카카오 공동체에서 널리 사용하는 협업 도구입니다. 생긴 것은 페이스북 같은 SNS와 유사하고 사용법도 거의 동일합니다. 어쩌면 다른 기업에도 이와 유사한 사내 시스템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아지트를 사용하는 카카오엔터프라이즈의 극도로 투명한 정보 공유 문화였습니다. 또한 업무에서 카카오워크를 십분 활용하여 신속한 커뮤니케이션과 효율적인 업무가 가능합니다.
① 모든 것을 공유한다
저는 이전에 5개 회사를 다녀봤습니다. 하지만 여기처럼 사내 정보를 모든 크루들에게 철저하게 공유하는 곳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 대표이사와 주요 경영진들의 주요 회의 내용이 낱낱이 아지트에 공개됩니다. 무슨 조선왕조실록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가 공개되어도 좋은가 싶습니다.
- 거의 모든 크루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이 아지트에 공개됩니다. 저도 스타트업 대표였지만 그리고 나름 투명하게 경영했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사용했던 신용카드 내역까지 공개할 생각은 못 했습니다.
- 원한다면 거의 모든 사내 팀의 업무나 진행 상황을 모두 확인할 수 있고, 오지랖 넓은 저 같은 사람은 댓글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짜로.
회사에서 모든 것을 공유해주지만 크루들도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일명 100:0 원칙으로 내부에 공개된 모든(100) 정보를 외부에는 절대 유출하지 않는다(0)는 것이죠.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율과 책임이 카카오엔터프라이즈의 중요한 문화 중의 하나입니다.
② 이메일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가 싶었습니다. 20년간 이메일을 회사 업무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메일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외 고객이나 파트너와 소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지트를 통해 거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의 글을 읽었으면 하는 크루에게 멘션(ex. @green)을 달면 됩니다.
이메일을 사용하면 정보는 특정 그룹이나 사람에게만 전달됩니다. 하지만 아지트에 글을 쓰면 멘션을 준 누군가에게 좀 더 잘 전달될 뿐, 거의 모든 사내 크루들이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보고가 아닌 공유에 가깝고, 이런 공개 공유 문화는 주도적인 업무환경을 조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③ 정보를 독점하지 않는다
이전 회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회사의 중요 정보가 특정 그룹이나 사람에게 독점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고 나쁜 사내 정치가 생기는 것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이렇게 거의 모든 정보가 공유되다 보니 정보 독점에 의한 폐해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나쁜 정치가 생기기 어렵고 정보 불균형이 없는 것은 장점이지만 회사 기밀이 유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나름대로 사내의 크루들이 회사 기밀을 잘 지키고 있는 것도 신기했고,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새로 합류한 리더들이 정보를 감추지 않고 투명성을 유지하는 문화를 지켜내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④ 진짜 수평 문화
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매우 수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로만 수평적인 게 아니라 정말 수평적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원한다면 사내의 어떤 회의라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요 경영진 회의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테스트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 회의나 들어가서 자기소개하고 그냥 참관했었습니다. 나중에 아지트에서 그 회의 이후의 진행 상황도 저는 계속 업데이트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팀의 예정된 어떤 회의라도 아지트에서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면 그 회의에 초대해주기도 합니다. 오지랖 넓은 사람이 다니기 정말 좋은 곳입니다.
-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1,000명이 모인 화상회의 방에서도 얼마든지 '싫어요' 버튼을 클릭하고 뼈가 담긴 송곳 질문을 합니다. 심지어 대표이사의 생방송에도 '싫어요' 버튼은 얼마든지 허용됩니다. 출퇴근이나 휴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떳떳하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 법인카드를 사용한 회식이나 식사 혹은 기타 비용에 대해 상한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양심적이고 상식적으로 상황에 맞게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서 실행합니다. 회사의 많은 제도들이 빡빡하게 규칙을 만들지 않고 최대한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을 믿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문화도 저에게는 참으로 낯선 문화네요. 전반적으로 무엇보다 맥락이 공유되고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는 수평적인 피드백이 가능한 환경이라는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빵빵한 지원
솔직히 이 부분은 가난한 스타트업에 있다가 와서 더 크게 느끼는 것이기는 합니다. 당연히 웬만한 스타트업과 비교 불가의 복지와 빵빵한 장비 지원이 있습니다.
① 개발 장비
가장 중요한 개발 장비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번에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 다니면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의자입니다. 20년 차에 접어든 저에게 허리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ㅠㅠ 그래서 이 회사에서 제공하는 허먼밀러 에어론은 그 무엇보다 감동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럭셔리 의자의 세계가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한번 접하고 나니 벗어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저희 집에도 허먼밀러 의자를 데려왔습니다(갑자기 의자 사용기로 변질...).
최고급 맥북프로도 빠질 수 없습니다. M1 Max CPU, 32GB 램과 1TB SSD의 맥북프로 16, 놀랍지 않습니까? 5백만 원에 육박하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요즘 같은 클라우드 시대에 굳이 이런 장비가 필요한 개발자가 사내에 몇이나 있을까 싶습니다만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노트북 컴퓨터가 저 정도이니 다른 개발 장비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듀얼 모니터도 가능하고 책상도 모션 데스크라서 역시나 허리가 중요한 저 같은(?) 개발자에게 감동을 줍니다.
② 기타
사실 그 외의 복지도 다른 대기업 못지않습니다. 의료비 지원도 직계가족까지 보장성 실손보험을 제공하고 특히 치과(임플란트)까지도 지원하는 등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저는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카카오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푸르니 재단)이 여타 다른 어린이집에 비하여 수준이 높은 것 같습니다. 이 어린이집이 너무 좋아서 이직하지 못하는 크루들도 많다고 하네요.^^;;
한 가지 특이한 건 각종 음료수나 과자 등이 무한 리필 수준으로 제공되어서 크루들의 당 떨어짐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세상 모든 달달한 과자 다 준비해놨어!’의 마음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개발자 중심의 기업문화
솔직히 지난 20년 경력 동안 이렇게 회사에서 개발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회사는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대표이사와 리더 대부분이 개발자나 엔지니어 출신이고 상품 의사 결정의 많은 부분에 개발자가 참여합니다. 개발자 연봉도 타 직군에 비해 높은 것으로 알고 있고 여러 방면에서 지원도 빵빵하지만 제가 무엇보다 이 회사가 개발자 중심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B2B 회사 특유의 수동적인 개발자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나라 B2B 회사들은 아무리 솔루션 회사라 할지라도 SI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고객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솔루션 요구사항에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바쁘기 때문에 제품의 기획과 방향성을 스스로 생각해서 계획하는 문화가 부족합니다. 자연스럽게 개발자들도 제품의 기획과 요구사항에 대해 수동적으로 변합니다. 고객이 원한다는 데 무슨 토를 달 수 있겠어요?
하지만 카카오엔터프라이즈 개발자들은 제품의 기획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그냥 무지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매우 큰 반감이 있습니다. 이런 문화 덕분에 기획 회의는 결코 기획자들의 단방향 대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텐션 높은 대화가 오고 갑니다. 저는 정말 B2B 바닥에서 이런 참신하고 낯선 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고객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하면 잘 구현할지만 생각해 온 지난날 무지성의 저를 비판합니다. ㅜㅠ 이미 B2C 시장의 혁신을 일궈온 DNA가 계속해서 흐르는 느낌이랄까요? B2B 시장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다면 카카오엔터프라이즈가 해내겠구나란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합니다.
단점이라면...
단점이 없는 회사가 어디에 있을까요?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도 몇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가장 아쉬운 것은 구내식당이 없다는 점입니다. 판교가 얼마나 가성비 떨어지는 식당이 많은지 아는 분은 아실 겁니다. 솔직히 매일 점심마다 식당 고르는 게 즐겁지 않고 고역에 가깝습니다. 조금이라도 인기 있는 식당은 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먹고살려고 회사 다니는 건데 현타가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2022년에 새로 조성되는 오피스에서는 뭔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아무래도 스타트업 시절보다 의사 결정 속도가 느리다는 점입니다. 물론 일반 대기업이나 SI 업체보다는 빠르겠지만 카카오 특유의 정보공유와 수평적인 문화 그리고 합의를 끌어내는 문화 때문에 스타트업 수준의 빠른 실행 속도는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쨌든 여기는 대기업이니까요. 하지만 일단 컨센서스가 형성되면 크루들이 보여주는 추진력과 몰입력에 감탄하곤 합니다.
마치며
이상으로 지난 1년 반 동안 회사에 적응하며 느꼈던 점을 최대한 솔직하게 적어봤습니다. 사실 B2B 업계에서 온 개발자들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많은 것이 다릅니다. 리더일수록 구석이나 창가 쪽이 아닌 통로 쪽에 책상이 있고 지원 부서나 보안 및 인프라 부서 사람들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은 천사 같은 분들이기도 합니다(대체 왜 이렇게 친절한 걸까요?). 아무도 채찍 드는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극도로 열심히 하는 구성원들을 보는 것도 신기합니다. 옛날 감성으로 보면 '어떻게 이렇게 회사가 돌아가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제가 너무 올드한 곳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B2B 시장을 공략하는 IT 회사 중에 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SI가 아니라 클라우드 기반의 XaaS(Anything as a Service) 사업으로 승부를 보려는 회사이고, 기업문화도 전통적인 B2B 회사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이런 B2B 회사도 성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감사합니다.